1.개요[편집]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독립자금을 지원한 공로를 인정받아 201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2.생애[편집]
하희옥은 1890년 9월 24일 평안도 용강현 산북방 국안리(현 평안남도 온천군 용월리)의 농가에서 농업에 종사하던 아버지 하동식과 어머니 김씨 사이에서 5남 7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8세까지 고향 서당을 다니다가 1908년 광동학교, 의명학교에서 수학했으며, 그후 도산 안창호가 세운 대성학교에 진학했다.
이후 독립운동을 위해 1912년 북간도로 건너가 간민회 등 독립운동단체 결사대로 활약하였다.
1915년에는 만주 무관학교에 입교하였으나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아 그만두고 친구의 권유로 1916년 5월 한병선, 백낙준 등과 동행하여 미국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간다. 그 곳에서 포도농장 품팔이에 종사하면서 대한인국민회 상항지방회에 신입회원으로 가입하였으며, 1917년 7월에는 장이욱과 도산 안창호와 재회한 후 흥사단에 입단을 권유받아 같은 해 12월 7일 입단하였다. 한편, 그해 9월에는 대한인국민회 은행채 보상 발기인으로 활동하였으며, 1918년 10월에는 대한인국민회 기관지인 『신한민보(新韓民報)』 식자기계 청장을 위한 동맹자 모집책으로 활동했다.
1919년에는 오하이오주애크런으로 이주하여 그해 1월 15일 대한인국민회 애크런지방회 설립에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구제원으로 취임했으며, 1921년에는 뉴욕으로 이주하여 뉴욕지방회 서기에 취임했다. 1924년부터는 시카고로 이주하여 그해 12월 재설치된 시카고지방회 재무에 취임하여 1928년 시카고지방회 구제원, 1933년 시카고지방회 부회장, 1934년 시카고지방회 법무, 1935년부터 1938년까지 시카고지방회 총무, 1939년 재차 구제원을 맡아 1940년까지 역임했으며,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시카고지방회 실업위원을 역임했다.
또한 학업보다는 사업에 소질이 있었던 하희옥은 뉴욕과 시카고 등지에서 1925년부터 1947년 사업을 접을 때까지 약 20년간 향료공장 경영을 하며 수 차례에 걸쳐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다.
1949년 12월에 흥사단 서무원 및 총무로 뽑힌 후 1950년 1월부터 1963년까지 공장을 경영했던 경험을 이용해 흥사단 미주위원부의 자금관리를 도맡아 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국내에 있는 동포를 위해 수 차례 모금활동을 하여 구제금과 구호품을 보내기도 했다.
3.사후[편집]
201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2020년 10월 7일 보배드림 커뮤니티에 공원에서 고급묘지로 사용하기 위해 리모델링 하면서 하희옥 지사의 묘를 불법이장하고 비석을 파괴했다는 폭로글이 올라왔다. 특히 이장한 곳이 산비탈에 봉분은 물론이고 아무런 표지석도, 잔디조차 깔지 않은 공터에 공익제보자가 사비로 비석을 세워놓지 않았다면 아무도 묘지인지 모를 정도로 황폐한 곳이였기에 많은 사람들의 공분을 샀고, 해당 사실을 취재한 것이 MBC실화탐사대에 2020년 10월 24일[2] 방영되었다.
이에 공원측에서는 반박자료를 공원 홈페이지에 올리고, 공익제보자를 허위사실 유포 등으로 고발하였다.
공원측 주장이 모두 맞다 하더라도 독립운동가의 묘비를 부수고 산비탈에 아무렇게나 이장해버린 점, 도산의 유훈을 잇는다는 사업이념을 강조하면서 도산의 재자 중 한 명인 하희옥 지사의 묘를 묘라고 부를 수도 없는 곳에 이장해버린 점에 대한 비판은 피할 수 없어 보인다.[3]
해당 사건이 2020년 10월 15일과 22일 국가보훈처 국정감사장에서 거론된 이후 MBC실화탐사대에서 찾아낸 하희옥 지사의 손녀와 DNA 검사 후 하희옥 지사의 묘가 맞다면 유족의 동의를 얻어 현충원으로 이장을 하려는 작업이 추진 중이다.
4.여담[편집]
흥사단의 주장에 따르면 안익태에게 비용을 주고 애국가 작곡을 의뢰한 분이라 한다.
[2] 101화
[3] 해당 공원은 흥사단이 1978년 1월 공원을 인수한 후 정부정책의 문제로 1980년 9월 8일 현 공원 운영자에게 무상양도한 곳으로 도산의 뜻을 잇는다는 것을 공원의 가장 큰 홍보문구로 사용하고 있다.
0/200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