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카페 체불임금 관련 카페에 글을 조금 올렸었습니다.
제가 적은 글을 보시면은 아시겠지만 명확한 물증 근거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숟가락으로 떠먹여 줄 정도이었지 그래서 그냥 맡겼습니다.
똥이 되더군요. 과거에도 몇 건의 고소 진정 같은 경우 좋은 근로감독관을 만나서 잘 해결을 봤습니다.
이번에는 소위 무식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면은 무섭다고 자기 멋대로 처리하는 아주
인간적으로 대화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불편한 사람이었습니다.
항상 전화하기 전에 마음을 가다듬고 심호흡하고 죄인처럼 조심스럽게 먼저 전화해서
물어봐야 하고 무작정 기다려야 하고 사업장은 언제 찾아가냐는 말을 1달 2달 3달 이상이
흘러가는 시간 동안 똑같은 대답 조만간 찾아가겠다.
너무나 답답한 저로서는 왜 찾아간다는 말만 하고 가지 않냐고 하면은
내 마음대로 하려는데 감 놔라 배 놔라 하지 말라는 식으로 간섭하지 말라고 말을 하더라고요.
다른 것은 다 떠나 갑질 괴롭힘 부당함 어떻게든 버틸 수는 있었습니다.
하지만은 돈은 다릅니다. 여유롭지 않은 사람은 저같이 1년 6개월 이상 일을 하지 않았고
할 수도 없는 저로서는 생명수와 같은 것입니다.
동사무소에 찾아서 긴급 생계지원을 받으려고 왔다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통장 거래명세 가족관계 등 다 알아보더라고요.
그리곤 3개월 60만 원씩 총 180만 원 정도의 돈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담당자분이 얼마나 딱했는지 기초생활 수급 제도를 활용해보라고 해서 해달라고 했습니다.
기간은 흘렀습니다. 어느덧 2024년 6월경
여차여차 힘들게 우울증으로 산재승인을 받아본들 주변 지인께 빌린 돈을 갚고
개인회생으로 밀린 금액을 갚고 실업급여 받은 것도 반환을 해버리고 나서 저에게 남은 돈은 정작 얼마 되지도 않더라고요
그렇다고 증세가 확 나아져서 일할 수 있는 형편도 아녔습니다.
기초생활 수급 쪽에서 실사가 나온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아직은 더 견뎌 보자 어떻게든 다시 회사에 다니고 취미생활 하면서 살고 싶은 마음에
버텨보겠습니다. 아직은 어떻게든 살아보겠다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은 받았으면 어떻게 되었냐는 생각도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가 결정을 한 것에는 후회는 없습니다.
얼마 전에는 약 성분이 몸이랑 맞지 않는지 블랙아웃(일시적 기억상실) 현상까지 겪었습니다
아버지의 폭주 술만 먹으면 감당 안 되는 폭력성 전 그게 너무 싫어 술은 입에도 대지
않으며 20대 때 몇 번을 마셔보았지만, 트라우마 때문인지 술을 몸이 거부했습니다.
그 뒤론 술은 저에게는 독이었고 먹는 음식이 아니어서 입게 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제가 자고 일어나서 보면 뒤죽박죽의 알 수 없는 오타 천지의 카독내용 또는 기억도 안 나는
통화기록 다행히 실수는 없었습니다.
대신 아시는 분이 소주 3병 정도 마신 사람인 줄 알았다고 할 뿐이었습니다.
미안하고 그런 실수를 또 할까 두렵고 무서워서 당장 병원으로 찾아가서 약을 변경했습니다.
담당의께서는 가끔 그런 환자가 있다고 하는데 먹기가 겁이 납니다
안 먹으면 힘들고 괴롭고 한없는 우울감으로 에너지가 바닥이 되어버립니다.
먹으면 다시 그런 증상이 나타날까 봐 겁이 나 지금 새벽인 시간까지 버티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연을 끊은 지 15년이 넘었습니다.
솔직히 아버지라고 부르고 싶은 마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도 혈육인걸요
어릴 때 기억은 몽둥이로 맞으면 그날은 행복한 날이구나 주먹으로 맞고 발로 차이는 것은 일도 아니었습니다.
기절하기도 많이 했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흉기에 찔리기도 했고요. 제가 어릴 때는 가정폭력은 그냥 원래 있는 거구나 생각할 정도로
주변에서는 신고도 하지 않고 신고해서 온다고 해도 좋은 말로 하세요 하고 가버렸습니다.
스포츠머리에 날카로운 외모였습니다. 잘생겼지만 살기가 돈다고 해야 할 그런 스타일이었습니다.
결국은 이혼을 하시더라고요. 제가 군에 있을 때요
어릴 때 친구를 처음으로 집에 초대했습니다, 친구들은 두 번 다시 우리 집에는 오지 않더라고요
너희 아버지 무섭다고 직감적으로 어린아이라도 느낀 것이겠지요?
그 충격에 저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었고 휴가란 것 자체가 통제되었고 의무실이 저의 내무실이 되었습니다
중대장이 바뀌고 그때부터 상병이 다되어 갈 때 100일 휴가 이후 일병 휴가를 처음으로 갔습니다.
아버지의 흰머리 늙은 모습 안쓰럽더라고요. 왠지 찡해지고 아무것도 몰랐었기에 그렇게 느꼈겠지마는
결혼한다고 하더라구요 재혼 큰고모와 아는 분인데 원래 첫 결혼만큼 좋은 사람을 만난다는 건 힘든 일인 거 같습니다.
그래도 와서 살려고 왔길래 어머니라고 해드렸는데 참 무섭더라고요.
사람 쉽게 바뀌는 게 아니라는 말이 절실히 기억나더라고요. 그래서 조심스럽게 말을 했습니다.
저희 아버지 보통 넘는 사람이니 보통 각오로는 같이 살기 힘들다
지금이라도 그럴 마음이 없다면 헤어지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고 경고 아닌 피해를 본 당사자로서 말을 했지만
그 말을 아버지에게 고자질해서 절 난처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여전히 폭력성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결국, 또 이혼당하고 혼자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결혼을 할 생각도 할 마음도 가지지 못합니다.
그래서 집을 나와 혼자 복학하고 전문대라도 가서 형식적으로 친지분들 가족 중에는
유일하게 전문대라도 나온 사람은 저 하나뿐이었습니다.
어머니와는 종종 연락하는데 수술을 하시고 지금 1년 이상을
일하지 못하고 있으십니다.
장남으로서 어머니에게 해드릴 수 있는 게 없어서 너무나 죄송스럽기도 하고
자책감에 자괴감에 오히려 삼짓돈까지 조금 모아놓으신 거로 주시더라고요
동생은 결혼해서 잘사는데 결혼하면 남이 된다고 하는지 어머니를 그렇게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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