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가 또 롯데했네”...영세 술도가 밥상 노리는 롯데표 감귤 브랜디
제주도 서귀포시 신례리는 연중 내내 감귤 농사를 짓는 마을입니다. 둥그런 몽돌이 깔린 공천포에서 시작해 제주도를 상징하는 오름이 늘어선 중산간(重山艮)까지 마을이 기다랗게 이어집니다. 섬 전체가 관광지라는 제주도지만, 공교롭게도 이 지역에는 관광객들이 몰리는 이렇다 할 관광지가 없습니다.
이렇게 조용한 마을에 최근 날 선 문구가 적힌 현수막이 붙었습니다. 롯데칠성음료가 이 지역에서 운영하던 감귤주스 공장을 술 증류소로 바꾼다는 소식이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1978년 문을 연 신례리 롯데칠성음료 제주공장은 원래 상품 가치가 떨어지는 감귤로 주스를 만들던 곳입니다. 2010년대 중반 감귤 수매철이 되면 제주공장 앞에는 신례리 감귤 농가 차량이 교통 체증을 빚을 정도로 끝없이 늘어섰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공장에서 가공한 감귤주스를 찾는 소비자가 급감하자 업종 전환을 해야 할 정도로 절박한 처지에 놓였습니다.
롯데칠성음료가 우리나라에서 위스키 같은 증류주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운 시점은 2021년 무렵으로 보입니다. 주스를 만들던 공장을 술 증류소로 만드는 과정은 생각보다 복잡합니다.
주스는 과실을 압착해 과즙을 짜낸 후 여과하면 됩니다. 증류주는 여기에 발효와 1차 증류, 2차 증류, 숙성 과정을 더해야 합니다. 거대한 발효조(탱크)와 나팔처럼 대형 증류기 뿐 아니라, 증류한 원액을 묵히기 위한 수없이 많은 참나무통도 필요합니다.
알려진 내용을 종합하면 롯데칠성음료는 2021년 6월 한국식품연구원과 손잡고 한국형 위스키 연구에 나섰습니다. 지난해 주류업계에서는 롯데칠성음료가 스코틀랜드에서도 손꼽히는 증류소 아드벡(Ardbeg) 출신 한국인을 고용해 증류 기술 확보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도 들렸습니다.
1년여간 연구개발 끝에 롯데칠성음료는 이윽고 지난해 5월 23일 서귀포시청에 ‘기타 증류주 및 합성주 제조업’을 추가한다는 내용으로 공장설립(변경) 신청서를 냈습니다. 3개월 정도 지난 8월 10일 서귀포시는 이를 승인했습니다.
롯데칠성음료 관계자는 “제주공장 증류소 전환은 지난해 IR(투자 설명회)에서 언급했던 부분”이라며 “현재 감귤(가공)공장 옆에 증류시설 착공을 준비 중이지만, 구체적인 일정이 잡히진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롯데칠성음료는 새 제주 증류소 1호 제품으로 감귤 브랜디를 선보이는 방안을 고려 중입니다. 브랜디는 과실주를 증류해 만듭니다. 포도주로 만드는 코냑, 사과로 만든 발효주 시드르(cidre)를 증류한 칼바도스가 대표적인 브랜디입니다.
아직 브랜디라는 이름이 생소하지만, 우리나라보다 먼저 주류 시장이 발달한 미국과 일본 같은 국가에서 브랜디는 소비 가격대가 높은 고급 주류로 꼽힙니다. 주류업계에서도 수제맥주와 와인에서 시작한 주류 소비 흐름이 위스키를 거쳐 곧 브랜디로 넘어갈 것이라고 예측합니다.
지역 특산물을 이용해 고급 주류를 만든다는 발상은 언뜻 신선해 보입니다. 농업을 6차 산업화하겠다는 국가 방침에도 일견 맞는 듯 합니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롯데표’ 감귤 브랜디에 우려를 감추지 못합니다. 롯데칠성음료 제주공장에서 어른 걸음으로 30분 정도 걸으면 도착하는 가까운 거리에 소규모 농업법인 ‘시트러스’가 있습니다.
신례마을 이장이었던 김공률 대표는 너무 크거나 작은 감귤들이 버려지기 시작하자, 이 감귤로 술을 빚기 위해 2013년 농업회사법인 시트러스를 세웠습니다. 이 회사는 신례리 140여 가구가 농사지은 감귤로 2014년부터 술을 빚기 시작했습니다. 공정은 진로에서 연구개발이사를 지낸 이용익 공장장이 담당했습니다.
그 결과물이 2016년 나온 국내 최초 감귤 브랜디 ‘신례명주’입니다. 신례명주는 발매 초기부터 브랜디와 위스키 애호가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다만 50도라는 높은 도수와 750밀리리터(ml) 한 병 기준 11만원에 달하는 높은 가격 탓에 판매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다 지난해 12월 요리연구가 백종원 더본코리아 대표가 만드는 유튜브 콘텐츠 ‘님아 그 시장을 가오’에 신례명주가 소개되면서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백종원 대표가 신례명주를 돼지두루치기와 함께 마시며 감탄하자, 시트러스가 만드는 주요 제품은 방송 직후 ‘완판’을 기록했습니다. 시트러스가 열었지만, 6년 넘게 깜깜했던 감귤 브랜디 시장에 빛이 비추는 순간이었습니다.
신례명주가 자리잡기까지 고군분투한 속사정을 아는 주류업계 관계자들은 ‘롯데칠성음료가 영세 술도가가 몇년간 공들여 차린 밥상에 숟가락만 올리려 한다’고 말합니다. 왜 하필 그 많은 증류주 중에서도 ‘감귤 브랜디’냐는 지적입니다.
한국전통민속주협회 관계자는 “브랜디는 2년만 숙성해도 VS(Very Special) 등급을 받을 수 있고, 4년을 묵히면 VSOP(Very Superior Old Pale)로 수준이 올라가기 때문에 훨씬 오래 묵혀야 가치를 인정받는 위스키에 비해 자금 순환이 쉬운 편”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또 “롯데 같은 대기업이라면 이미 작은 양조장이 만든 제품을 따라하기보다 중소규모 양조장이 하지 못하는 시도를 해야 우리나라 술 수준이 높아지지 않겠냐”고 꼬집었습니다.
곳곳에서 롯데칠성음료에 대한 이런 우려가 나오는 이유는 예전에도 비슷한 ‘전력(前歷)’이 있기 때문입니다. 롯데칠성음료는 지난해 11월 ‘처음처럼 새로’ 소주를 선보이면서 중견 수제맥주 브랜드 카브루의 상징 구미호 캐릭터를 따라했다는 논란에 휩싸였습니다.
그 이전에는 ‘순하리 레몬진’이 일본 코카콜라가 생산·판매하는 레몬 알코올 음료인 ‘레몬도(??堂)’ 콘셉트와 캔 디자인, 글자체와 색감까지 표절했다는 지적이 나왔습니다. 더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 글라소 비타민워터를 그대로 복제한 듯한 데일리C 비타민워터 사례도 있습니다.
롯데칠성음료는 아니지만, 같은 롯데그룹 계열사 롯데헬스케어는 최근 한 스타트업과 아이디어 탈취 논란의 중심에 섰습니다. 롯데표 감귤 브랜디가 단순한 아이디어 차원이라도 작은 양조장들이 긴장하는 이유입니다.
시트러스 관계자는 “롯데칠성음료가 감귤 브랜디와 관련해 먼저 연락하거나 논의한 바는 없고, 시장 진출을 검토한다는 이야기도 기사를 통해 알았다”며 “당연히 걱정이 되지만, 대기업이 들어와서 감귤 브랜디 시장이 커지는 방향으로 발전하길 기대한다”고 말했습니다.
최근 인터넷에서 롯데라는 기업 이름은 더러 동사로 쓰입니다. ‘롯데가 롯데했다’라고 검색하면 관련 글이 수두룩합니다. 납득이 어려운 불공정거래나 교묘하게 법망을 빠져 나가는 사례를 조롱하는 일종의 밈(meme·인터넷 유행 콘텐츠)입니다.
이름이 널리 알려진 대기업 가운데 이렇게 이름이 쓰이는 경우는 롯데 밖에 없습니다. 모쪼록 새로 짓는 롯데 제주 증류소가 이런 오명을 넘어 해법을 찾길 바랍니다.
- Copyright ⓒ 조선비즈 & Chosun.com -
여윽시 롯데!!!
0/200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