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로 출궁한 뒤 남자와 사통까지...
조선은 명나라와 사대관계를 유지하며 각종 물품과 인력을 조공으로 바쳤다. 당시 명나라 황제 선덕제는 조선에 요리, 가무, 허드렛일 등에 능한 여성들을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1427년 조선에서 파견한 명나라 황실을 모실 여종들의 명단에는 장미의 이름도 포함되어 있었다.
명나라 황실에 보내는 인력이었던 만큼 세종이 직접 관여하여 꼼꼼하게 인원을 선발할 정도였다. 이 명단에 포함되었다는 것은 장미가 단순한 궁녀가 아니라 나름대로 능력을 인정받은 인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래대로라면 장미는 이제 남은 평생을 명나라에서 보내야 할 운명이었다. 그런데 선덕제가 몇 년 후 사망하면서 명나라 황실에서는 조선 출신 여종들 중 몇몇을 고국으로 돌려보낼 것을 결정했다. 장미 역시 그 명단에 포함되어 8년 만에 정든 고국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귀국한 지 얼마되지 않아 장미의 이름은 또다시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된다. 1435년 5월, 병을 핑계로 궁밖으로 외출했던 장미가 세종의 5촌 조카인 신의군 이인과 사통한 혐의로 적발된 것. 장미는 거짓말로 출궁한 데 이어 술자리에서 여러 남자들과 어울렸고 심지어 외박까지 한 것이 드러났다.
<속대전>에 따르면 조선의 국법상 궁녀는 왕의 승은이 아니면 평생 수절해야 했다. 외간 남자와 사통한 궁녀는 대역죄와 맞먹는 엄벌의 대상으로 취급되어 남녀 모두 참수하게 되어 있었다. 가뜩이나 이미 태종 안마폭행사건으로 막장 궁녀 취급을 받으며 거의 죽다가 살아났던 장미였기에 외간 남자와의 스캔들은 더욱 치명적이었다.
하지만 장미는 이번에도 놀랍게도 혐의를 밝히지 못하여 처벌을 면했다. 오히려 세종의 조카인 이인만 평안도로 유배를 가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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